Artistist Statement
In the Mood for Stillness
집의 고요
우리집은
대문이 없다.
밥 먹은 것
길에서도 다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 불러
“어이, 밥 좀 묵고 가.”
“나 밥 묵었는디.”
밥 먹었으면
그냥 가면 되지
들어와 앉아
밥 먹는다.
똘방에 금세 고무신이
까마귀 떼다.
김용택 “밥”
대문이 없는 동네가 있다. 그곳의 옛 집들엔 꽉 닫힌 대문 대신 집 주인의 거처를 알리는 정낭이 있었다. 정낭은 짐승들의 출입을 막기 위한 도구였기에 집 안이 훤히 보이는 열린 대문이었다. 지금도 그곳은 대문이 없거나 있어도 활짝 열려 있는 집들이 많다. 아내의 고향 제주, 그녀의 고향집은 도심에 있어도 대문이 항상 열려 있을 정도이다. 제주는 여전히 아파트가 아닌 주택 중심의 문화이고 집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 마을이 사라져 버릴 거 같았다.
‘고요하다.
인적이 사라진 곳엔 바람 소리, 파도 소리만이 정적을 메우고 있다.
적막강산이다.’
‘In the Mood for Stillness’는 제주 빈집의 풍경을 담은 사진 연작이다.
제주도 빈집에 시선이 머물렀던 것은 여행지가 아닌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고향인 제주에서 아기를 키우면서 마을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빈집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던 것은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이 곧 신기루가 될 것이라는 상상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잠시나마 주택에 살았던 나에게 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커다란 인생 하나가 사라지는 것으로 다가왔다. 그저 몇 년 동안의 주택 살이었지만 가을이면 열리던 감나무의 고즈넉함, 마당에서 뛰놀던 강아지의 숨소리, 미로와 같았던 지하실의 공포감은 지금도 생생한 유년 시절의 풍경이다. 결혼 전까지 한집에서 살며 켜켜이 추억을 쌓아왔던 아내는 고향집에 갈 때마다 그 기억을 쉽게 소환할 수 있다. 집의 정서가 주는 안정감은 제2의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주택이 낭만이 된 것은 현재진행이 아닌 과거일지도 모른다.
주택 살이의 낭만은 수고로움과 불편함을 견디는 자들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다. 낭만은 다시 못 올 것이라는 노랫말이 있다. 낭만의 반대말은 현실이 아닌 야만임을 우리는 서울 그리고 지역 곳곳에 들어선 아파트를 보며 느낄 수 있다.
제주는 한때 이주 열풍이 불 정도로 도시를 떠나 사람들이 몰려왔던 지방의 유일한 지역이었다. 제주 유입 인구 감소와 함께 개발 광풍은 잦아든 것 같지만 여전히 새 숙박 시설과 거주 시설 공사는 한창이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빈집도 늘어가고 있다. 과거 제주도에 많은 것이 바람, 여자, 돌이었다면 지금은 그 자리를 카페, 펜션 그리고 빈집이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폐가의 혐오스러운 풍경과 달리 사람의 온기가 남아있는 ‘제주의 빈집’을 보면서 나는 곧 사라질 풍경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계절이 지났음에도 수확하지 않아 바닥에 떨어진 귤’
‘때로는 빈집의 주인으로 만나는 고양이들 그리고 무성한 잡초들’
을씨년스러운 공포감이 집을 둘러싸기 전의 그 공간에는 제주의 정취가 스며들어 애잔한 정서가 남아있다. 나는 빈집의 모습을 바라보며 슬프지만 아름답다는 양가의 감정을 느꼈다. 집에도 인연이 있다면 그곳에 불이 켜지고 다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상상하며, 적막한 공간에 숨결을 불어 넣는 마음으로 마을 곳곳을 다니며 빈집의 서정적 풍경을 기록하였다.
빈집에서 그리는 집의 완성
글: 박지수(보스토크 매거진 편집장)
하얀 종이 위에 검은 선을 긋는다. 삼각형을 먼저 그리고, 이어서 정사각형을 그려 연결하면 집이 완성된다. 허공에 지붕을 먼저 짓는 건 현실에서 실현할 수 없는 건축 기술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작은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그리는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다. 아이들이 그린 집은 쓸데없이 크거나 화려하지 않고, 군더더기가 없다. 삼각형의 지붕과 정사각형의 벽만 있어도 충분한 것이다. 그 모양새가 비록 단순할지라도 핵심이 빠지는 법은 없다. 아이들이 집을 그릴 때, 대개 가족을 함께 그리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그림에서 가족 없이 집만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림 속에서 집은 어디까지나 가족을 위한 배경일 뿐이다. 엄마와 아빠, 형과 오빠, 누나와 언니, 동생 그리고 강아지와 고양이… 어쩌면 아이들은 결국 가족을 그리기 위해, 먼저 삼각형 지붕을 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은 집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나란히 손을 잡은 모습을 그리는 대목이다. 때로 역세권을 위해, 8학군을 위해, 갭투자를 위해,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라는 식의 허울을 위해 존재하는 어른들의 집과 달리 아이들의 집은 오직 우리 가족을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방형 프레임 안에 집이 가득 채워진 사진들을 바라보며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떠올린다. 삼각형과 사각형이 함께 이루는 단순하고 소박한 집의 모양새가 서로 닮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그림과 달리 사진 속에는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다. 여러 사진을 계속 들여다봐도 사람은 한 명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모두 폐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선기의 사진 작업 <집의 고요>는 사람이 떠난 빈집들을 차례차례 보여준다. 그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육아휴직을 내고 아내의 고향인 제주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빈집의 풍경이었다. 허물어진 담과 잡초만 무성한 마당, 깨진 창문과 허물처럼 벗겨진 페인트칠…. 가족이 떠나고 껍데기만 남은 빈집은 마치 곡기를 끊은 사람처럼 생기가 없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주변의 아름다운 파도 소리와 눈부시게 푸른 하늘은 오히려 잔인하게도 빈집을 더욱더 쓸쓸하고 애잔하게 보이게 했다. 다시 바라보고, 주위를 둘러봐도 빈집에는 그저 적막만 찾아들고, 적막만 머물다가 적막만 빠져나갔다. 오래된 우물처럼 깊고 어두운 세월이 고여 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 않는 그 빈집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제주살이의 이면을 엿볼 수 있었다. 한 달 살기, 일 년 살기…. 제주살이의 열풍은 그저 한때의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 버렸다. 제주 역시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지방 소멸과 인구 감소, 인구 공동화 현상을 심하게 겪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빈집이 자꾸만 늘어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선기의 눈에는 유독 이 빈집들이 일종의 시각적 충격으로 다가온 것 같다. 그 이유를 짐작하자면, 앞서 언급했다시피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이 폐가를 더욱더 을씨년스럽게 부각시켰을 것이다. 또한 노래 ‘제주도의 푸른 밤’처럼 흔히 우리가 낭만의 장소로 제주가 적당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을 때, 빈집이 안겨주는 어두운 그림자는 더 짙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빈집에서 시각적 충격을 받는 것과 이 빈집들을 찾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다시 말해 시각적 충격을 받는다고 해서 모두 그 대상을 시각적으로 수집하는 여정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김선기는 제주도의 해안도로를 따라 빈집을 쫓아다녔다. 얼마나 많은지도 모른 채, 얼마나 마주할지 모른 채,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빈집을 수소문해 찾아내고 기록했다. 그렇게 제주도에서 촬영을 시작했던 그는 빈집 중에서도 애써 단독주택만 골라 찾아다녔다. 게다가 아이들의 그림처럼 삼각 지붕과 사각 벽으로 이뤄진 단층집 앞에서만 유독 카메라를 세웠다. 그리고 마치 여권용 증명사진을 찍듯이 정직하게, 한편으론 여권용 증명사진처럼 까다로운 규칙을 스스로 세우고, 이에 맞춰 촬영을 진행했다. 지나치게 맑은 날은 피하며, 가급적 흐리고 구름이 있는 날. 아이레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눈높이를 유지하며, 가급적 와이드하게 잡지 말고 집만 온전히 타이트하게 프레이밍할 것. 최대한 정면에서 마주 보는 듯하게 바라보며, 한 울타리 안에 안거리(안채)와 밖거리(아래채)가 이어진 제주의 전통적인 주거 형태에서 각각을 따로 분리해 독립적으로 보여줄 것. 이러한 나름의 규칙들이 집약된 촬영 결과물은 폐가를 지나치게 크게 미화시키지도 않으며, 반대로 과하게 어둡고 음울하게 나타내지 않는다. 다만 삼각과 사각으로 이뤄진 집의 형태 자체를 정방형 프레임 안에 알차게 담을 뿐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만들어지는 과정도 그렇고, 그 결과물도 그렇고, 결국 증명사진이다. 비록 낡고 더럽고 누추하고 볼품없고 어지럽힌 폐가이지만, 또 누군가는 혐오스럽게 느낄지도 모를 풍경이지만, 작가는 차근차근 집집마다의 증명사진을 남겼다. 보기에 그리 좋지 않은 모습이지만, 이 또한 속절없이 없어질 것임을 알기에 그 사라짐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걸음을 멈추고 카메라를 세우는 것이다.
모든 것은 무너질 수 있다
집도 육신도
그리고 적도
무너진다
그것들의 리듬이
흐트러지면
- 앤 카슨,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중에서.
시간과 겨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 그렇기에 시인은 집도 육신도, 하물며 적마저도 결국 무너진다고 일러준다. 어쩌면 사라짐만큼 모두에게 공평한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모든 사라짐마다 매번 연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을 순간이나마 멈출 수 있는 카메라는, 이 기계장치를 손에 든 사진가들은 언제나 사라짐의 마지막 포즈를 붙잡으려고 한다. 무너지는 순간에도 스펙터클이 깃들기에, 그 앞에서 우리는 눈과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때로 카메라를 든 자들은 무너지는 순간의 스펙터클을 낚아채기 위해 돌진하듯이 피사체에 달려들기도 한다. 사라짐을 기록한다는 명분으로 무너짐의 순간만을 기다려 마구 셔터를 눌러대는 것이다. 전쟁터와 폐허, 재개발 지역과 폐가 주변에 언제나 카메라가 맴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카메라는 폐허와 폐가 사이에서 무너짐과 사라짐을 끄집어내어 눈으로 확인한다. 이를 냉정하게 말하면, 일종의 시신 확인 과정인 셈이자 시체 애호와 다를 바 없다. 가끔 지나치게 폐허와 폐가만 샅샅이 헤집고 다니는 카메라를 보면, 시신 위에 덮어둔 하얀 천을 마구 들춰보는 노골적인 몸짓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에 비하면 김선기의 동선은 그저 빈집 주변을 조심스럽게 맴돌 뿐이다. 그는 마음대로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간 뒤 곧장 현관문으로 들어가 안방의 장롱 안을 살펴보거나 거실 창문을 열어보는 등 점령군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결코 하얀 천을 들춰 얼굴을 확인하지 않는 그의 카메라는 그저 대문 밖에서 거리를 두고 바라볼 뿐이다. 이는 사라짐 앞에서, 카메라를 든 자로서 예를 차리는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선기가 이토록 조심스럽고도 정직한 시선으로 빈집의 증명사진을 찍는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으리라 짐작한다. 지금 여기에 카메라를 세우고 눈앞의 빈집을 보지만, 그의 시선이 궁극적으로 가닿는 곳은 아마도 자신이 살았던 집 그리고 앞으로 살고 싶은 집이 아닐까 싶다. 결국 이 사진들에 담긴 단층집은, 아이들의 그림처럼 단순한 저 모양새는 결국 그가 생각하는 집의 원형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제주의 빈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마당에 감나무가 있던 그 집을 떠올릴 것이다. 매일 함께 시간을 보냈던 강아지의 숨소리, 또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미로 같았던 지하실의 공포와 설렘까지도…. 그런가 하면 아내와 새로 태어난 아이와 어떤 집에서 살아야 할지 생각할 때에도 옛집을 떠올릴 것이다. 어린 시절에 느꼈던 집의 충만함을 아이에게도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두가 떠나 빈집 앞에서도 그는 우리 가족이 앞으로 살아갈 집을 궁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제주의 빈집은 비록 지금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을지라도, 그 이미지는 어제의 옛집과 내일의 새로운 집으로 그를 연결해 준다.
누구나 집을 꿈꾸고, 집을 원하고, 집이 필요하기에, 이 거대한 도시마저도 결국 ‘나의 집’에서 비롯되기에, 그 누구보다 김선기에게 유독 집이 특별하고 절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전작에서 오랜 시간 치매로 투병하던 할머니가 집을 떠나는 과정을 기록했기에, 또 시간이 흘러 새로 탄생한 아이를 기르기 위해 제주로 거처를 옮겨왔기에, 그가 빈집을 마주하게 된 우연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집을 떠나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의 시선이 이제 모두 떠난 빈집에 머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서늘해진다. 하지만 그 시선이 단지 떠난 자리에만 고여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거듭 빈집 앞에 카메라를 세운 이유 역시 그 떠난 자리를 새로 채워줄 존재를 상상하고 기다리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김선기가 찍은 빈집의 증명사진은 아직 완성된 그림이 아니다. 그가 사진으로 그린 삼각 지붕과 사각 벽의 집 역시 아이들의 그림처럼 가족이 깃들 때 완성될 것이다. 빈집마다 떠난 자리가 선명한 사진을 찬찬히 바라보며, 화면 속으로 걸어오는 과거와 동시에 미래의 누군가를 상상한다. 엄마와 아빠, 오빠와 형, 언니와 누나, 동생 그리고 강아지와 고양이….
박지수(Park Jisoo)
<보스토크> 매거진 편집장. <월간사진>, <VON>, <포토닷>을 거쳐 현재까지 줄곧 사진잡지에서 마감에 시달리며, 사진과 글을 고르고 다듬는 일을 해오고 있다. <경향신문>, <시사IN>, <AXT> 등에 사진 관련 칼럼을 연재했으며, 그동안 사진에 관해 쓴 글을 엮어 개인전 《기억된 사진들 2010-2020》(2020)을 열었다. 사진전 《리플렉타 오브 리플렉타》(2016), 《이민지 개인전: 사이트-래그》(2018), 《윤성희 개인전: 표지 없는 지도와 지워지는 사진들》(2024), 《조재무 개인전: Front and After》(2024)를 기획했고, 사진 전시/판매 플랫폼 《더 스크랩》(2016)의 공동 기획팀에 참여했다. 책『잡지 만드는 법』(2023)을 썼다.
Artistist Statement
나의 할머니, 오효순
몹시 아프던 날 나를 들쳐 업고 달리던 땀에 젖은 등자락
이제 난 알지 돌아가셨어도 나에게 누나에게 살아있음을
어머니, 아버지에게 숨 쉬는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中 루시드폴
어린 시절 명절에만 할머니를 만났던 나에게 애틋한 할머니와의 추억은 한 손을 펴서 헤아려도 손가락 개수가 남을 만큼 별로 없었다. 그런 할머니와 갑자기 함께 살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칠순이 넘은 노모를 모시기로 하셨다. 처음엔 잘 안 들린다고 말씀하시던 할머니는 점점 기억과 인지 능력을 잃어갔다. 치매는 당사자에게도 힘든 시간이지만 가족에게도 고통이었다. 집을 나서 돌아오지 않는 날에는 온 가족이 나서 할머니를 찾아야 했고 밤새 소리를 지르시는 날에 우리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아픈 할머니를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할머니와 교감의 시작이었다. 치매 초기에 혈기 왕성한 할머니는 이유 없이 집을 나서 거리를 방황하셨고 방에 있는 서랍을 모조리 꺼냈다 넣기를 반복하는 등 알 수 없는 행동을 하셨다. 당신을 찍는 것에 육두문자를 남발하는 할머니 앞에서 나는 카메라가 폭력은 아닐까 망설인 적도 많았다. 내가 고민의 결론을 내리기 전에 할머니께서 먼저 카메라를 신경 쓰시지 않게 되었다. 할머니와 나는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벽을 허물었다.
할머니는 점점 기력이 쇠하셔서 걷지 못하게 되었고 가끔은 나의 존재를 그리고 가족을 몰라보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카메라를 놓고 바쁜 일상에 쫓겨 살았지만 어머니께서는 변함없이 할머니를 돌보셨다. 흑백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며 간직했던 할머니의 형상이 화석이라도 된 듯 야윈 할머니의 모습만이 남았을 때 나는 의무감처럼 할머니를 다시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어머니께서 할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하던 때의 연세가 되셨다. 병간호의 세월 동안 어머니는 함께 아프시고 늙으셨지만 담담하게 일상으로 받아들이셨다. 2019년 3월 1일, 할머니께서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소천하셨다.
1924년생 할머니, 오효순.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일제 식민지 시대, 6.25 전쟁도 아닌 6남매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대신해 짊어졌어야 할 삶의 무게를 감당하는 시간이지 않았을까? 그 짐이 너무나도 무거웠기에 할머니의 여생 동안 성하게 남은 손발톱은 없었다. 밥벌이의 무게가 남긴 몸의 기억은 치매를 앓는 동안에도 불편한 손으로 바느질을 하는 상흔을 남겼다. 그렇게 할머니는 삶을 내려놓을 때도 쉽게 놓지 못하시고 계속 꿈을 꾸셨는지도 모르겠다. 치매를 앓고 떠나신 할머니의 15년의 세월이 그동안 꿈을 꾸시다 돌아가신 것만 같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처음엔 악몽이었을지 몰라도 마지막에는 행복한 꿈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할머니 1주기를 맞아 산소에 꽃을 심었다. 화분에 담겨있던 풀과 꽃이 땅에 뿌리를 내리자마자 벌이 찾아왔다. 할머니께서 찾아와 인사를 한 것처럼 따뜻한 봄바람이 가족에게 불었다.
Hyosun Oh, My grandmother
Her sweaty back carrying me on when I was very sick.
Now I know she is still with me and my sister though she went to the heaven.
Grandma’s breathing heart is wide as the ocean to my mom and dad.
‘Grandma’s heart is wide as the ocean’ song by Lucid Fall
When I was little, I rarely met my grandmother but only on some holidays. So, I didn't have many fond memories with her that I could even count on my fingers. Yet, suddenly we got to live together as my father decided to take care of her on her seventy’s. She lost her hearing first but gradually lost her memory and cognition. Dementia was heart aching pain for herself and our family members. When she went outside and could not fine her way home, we all had to look for her. When a night of her screaming all-night came, we had to give up our sleep, as well.
The idea of documenting my grandmother’s daily life was the point I started communing with her. At the early stages of dementia, she wandered around the streets without any reasons and repeated strange actions such as taking in and out stuff from the desk drawers. Often, she cursed me while I took her pictures, which made myself ask whether my intent is a kind of violence. She, however, started not caring of my camera before I answer the question. We finally broke down the wall between me and my grandmother by the camera.
As time goes, she gradually became too weak to walk by herself and sometimes could not recognize me and our family members. At some point I stopped documenting her and led my busy life, but my mother kept taking care of her.
And one day, I found that she lost almost all of her weight and only her skeletons remained on her body. Out of a feeling of duty, I started recording her into the frame again.
Now my mother became the age of my grandmother when she moved in with us. Throughout the years of nursing, mom also got sick and aged, but she embraced the times calmly as her daily life. On March 1, 2019, my grandmother passed away in peace while her family members were with her last moment.
My grandmother, Hyosun Oh, born in 1924.
I think her biggest burden was not the harsh days of Japanese colonial time or Korean war but to raise six children without her husband. To survive out of her burdens, she had to work hard, and it costed almost all her nails. As her body remembered, she sewed with her uncomfortable hands even when she was suffering from the dementia. Even in the times of giving up herself, she could not let it go easily but might have kept dreaming of it. I feel like she was dreaming over the fifteen years of her dementia and left to the heaven. But I believe her dream might look like a nightmare at the beginning but eventually turned out as a sweet dream in the end.
Marked the first-year anniversary of her death, I planted flowers around her cemetery. As soon as the flowers were moved to the ground, a honeybee came. Gentle spring breeze welcomed us just like my grandmother came and greeted us.
<나의 할머니, 오효순> 展 관련 매체 소개
1. 언론 보도
- 중앙일보 ‘치매 할머니가 인형 꿰맨 사연, 손자의 카메라는 안다’ 서정민 기자 (2020년 4월 6일)
- 조선일보 [창작의 순간] ‘가족의 죽음, 그 슬픔의 언덕을 넘어‘ 조인원 기자 (2020년 5월 7일)
- 중앙SUNDAY [사진의 기억] ‘바느질의 추억만은 남아’ 박미경 류가헌 관장 (2023년 10월 7일)
- KOGAS [사람愛온도] ‘가족이라는 그리움을 담다’ 김승희 기자 (2020년 20호)
2. 방송 출연
-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53화 ‘기억을 걷는 시간’ (2020년 5월 6일)